수건답례품

여름이 시작되는 6월의 첫날, 김혜영 작가의 단편소설집 <아보카도>를 만났다. 이 책에는 제15회 동서문학상(2020년) 대상 수상작 '자염', 제7회 서귀포 문학작품 공모전(2023년) 당선작인 '박수기정의 노을'이 수록되어 있다. 8편의 이야기는 잘 숙성된 열대 과일 아보카도처럼 부드럽다.

작가는 빨갛게 곪아 있는 인간관계를 팍 터트린다.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살 수 없으니 다시 주인공들은 서로를 마주할 것이다. 소설 속에서 관계가 끊어질 듯한 사건들이 발생한다. 주인공은 확연히 자신의 내면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 가식적인 관계에 지친 독자에게 공감과 화해의 시간이 찾아오길 바라는 듯하다.

작품 '자염'은 충청도 바닷가 마을에서 한 노인이 전통 방식으로 소금을 만들며 겪는 시련과 애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비교적 수월한 천일염으로 소금을 생산하지 않고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만드는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처럼 자염을 지킨다. 그러나 자염을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져 죽음을 앞둔 노인은 뒤를 이을 계승자를 찾지 못 한다.

자염을 만드는 일은 시간과 노력을 적게 들여 높은 소득을 내는 것이 우선인 요즘 세대의 셈법에 정반대되는 일이다. 그는 지역의 문화원을 찾아가 삼국 시대부터 이어온 자염의 맥을 이을 수 있도록 부탁한다. 그 후 노인은 떠나지만 가족과 지역이 함께 노력하여 사람들에게 자염을 알린다.

세계 문화가 SNS 등을 통해 빠르게 교류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한국에는 작품 속 노인과 같이 묵묵히 우리의 것을 지켜온 장인들이 있다. 작가는 이러한 장인 정신을 자염이라는 소재로 작품 속에 녹여 냈다.

소설집 첫 면에 소개되는 '박수기정의 노을'은 서귀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치유의 소설로 제7회 서귀포 문학작품 공모전 당선작이다. 주인공 선은 아토피 피부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우울증을 겪게 된다.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었던 선은 박수기정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려 한다. 그때 그곳에서 낚시를 하던 규가 그녀를 향해 외친다.

"여봐요. 두 시간만 기다려요. 어차피 갈 건데 뭐 그리 바뻐요."

그녀는 그 말을 듣고 노을을 바라본 뒤 그 노을을 매일 보고 싶다는 심경의 변화를 겪는다. 그렇게 그녀는 위험한 고비를 넘긴다. 그리고 규와 그의 아이와 함께 제주도에서 청귤 농사를 지으며 20년 넘게 살게 된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선은 군산 오름의 노을을 선물한다.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과 인심이 지치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며 하나의 자연을 이루는 모습을 차분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작품을 읽는 내내 제주도의 삶이 잘 묘사되어 함께 그곳을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아보카도'는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작품으로 부드러운 과육과 단단한 씨앗이 합쳐진 과일의 생김처럼 내면과 외면이 서로 다른 두 여인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남편을 잃고 두 아이를 키우며 힘들게 공부방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그녀의 앞집으로 이사 온 영은은 남편의 사업 실패로 같은 아파트에 살지만 곧 재기에 성공하여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

주인공은 영은의 부족함 없는 생활이 부럽기도 하고 그녀의 호의가 좋기도 하지만 주눅이 들고 시기심도 생기는 양가의 감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영은의 남편이 외국으로 발령이 나면서 아주 복잡한 상황이 전개된다. 영은의 극단적인 선택을 계기로 주인공은 그녀의 가정 불화를 알게 된다. 왜 영은은 그렇게 자신을 완벽하게 포장하며 살았을까. 어쩌면 남편이 다시 돌아올 거라 기대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보카도 씨 얘기를 하다 갑자기 서늘하게 빛났던 영은의 눈빛이 떠올랐다. 칼로 내려칠 용기, 영은이 쥔 것은 칼자루 대신 결국 칼날이었던 걸까, 부드러운 과육 속 크고 단단한 씨처럼 오랜 시간 응집된 분노였을까.'

촛불이 뿜어내는 미세한 빛에 의지해 무언가를 열심히 닦는 모습입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며칠째 집 밖을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수염은 더부룩하고, 고약한 냄새가 방안을 진동합니다. 얼마나 굶었는지 볼은 핼쑥하기 짝이 없습니다.

식음을 전폐한 그의 시선 끝에는 글자 모양의 금속이 놓여있습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 낸 문자 모양의 금속을 보면서 그의 뺨에 눈물이 흘렀습니다. 뜨겁게 달궈진 쇳물을 견딘 아름다운 글자가 주는 황홀경. 남자의 이름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유럽에서 최초로 가동식 금속 활자(알파벳 단위로 만들어진 금속을 배치하는 인쇄 시스템)를 발명해 낸 사나이였습니다.

'공가'의 주인공은 재개발이 시작된 아파트로 딸 수연과 함께 찾아든다. 예상치 못한 남편의 사업 실패로 그곳에 임시로 기거하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회상한다.

금속활자는 혁명이었습니다. 더 이상 책을 한자 한자 써 내려갈 필요가 없어져서였습니다. 활자에 잉크를 바르고 찍어낸다면 몇 장이든 만들 수 있었습니다. 지식은 이제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었습니다. 구텐베르크는 큰 부자가 될 생각에 미소만 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도착한 건 ‘부’가 아니라 ‘소송장’이었습니다. 금속활자 인쇄기를 내놓으라는 요구였습니다. 청춘을 다 바쳐 혁신적 발명품을 만들었는데, 그 공을 탈취하겠다는 것이었지요. 구텐베르크의 소송전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대변혁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상인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유럽 전역에 인쇄 시스템이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지적혁명을 폭발한 계기였습니다. 그 역설을 탐색할 시간입니다.

소설 속에서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새 아파트가 지어져 번화가가 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빈민가가 된다. more info 그리고 낡은 곳이 새롭게 재탄생하고 번화가가 노후 지역이 되는 개발의 이면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도시의 빈민이 된 주인공은 마지막 희망인 딸과의 연락이 끊어지자 현재 머무는 곳에 스스로 공가라고 표시하고 안에서 문을 잠근다.

'막막함은 가슴을 조여 오는 조급증을 함께 동반한 채 찾아왔다. 투쟁할 상대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희망적인가. 싸울 상대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


궁지에 몰린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없을까. 도시는 뿌리내리길 거부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밀쳐내고 곧 헐리는 건물에서 그녀는 오히려 두려움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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